나는 백수가 되면서 돈을 함부로 쓰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학생일 때는 이른바 불량채권이었는데, 이제 완전히 부도수표가 아닌가? 내가 검약에 신경씀은 아직도 겨울왕국 블루레이를 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르멜라도프("죄와 벌"에 나오는 술꾼. 나는 도서관에 근무하며 그이와 매우 흡사한 인성의 위인을 목격했다)의 반성에 지나지 않을 것인데, 게임은 계속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절약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것이다. 가령 내 부모 되시는 두 분은 굉장히 절약하고 살았는데, 이는 여유가 있는 조부모들을 일종의 보험으로 둔, 일종의 양식적인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60년대 히피들의 근검이랄까. 따라서 검약에 절박함은 그리 묻어나지 않았다(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나 역시 아르카디("미성년"의 주인공)처럼 일 년 동안 '빵에 소금만 찍어 먹고' 살아 보기도 했지만, 그 덕택이랄까 결핵에 걸린 이후 그런 짓들마저 포기했다. 폐병에 걸렸다고 대작가로 죽을 시대가 아니니(물론 누구나 대작가로 죽는 건 아니다마는. 이를테면 "백치"의 이폴리트. 아니나다를까 나는 그이를 '나'로 내세운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이를 매우 유감스럽게 여긴다.
그럼에도 오늘 나는 2만 6천원이라는 돈을 영화를 보는 데 소모한 바, 이는 술집에 다시 찾아온 마르멜라도프만큼이나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 하겠다. 나는 겨울왕국 블루레이 대신에 어떤 영화를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폐병을 앓은 사람이 이 미세먼지에 외출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나는 오늘의 행동을 그리 후회하지 않는다.
『홀리데이』라는 영화에 대한 평 - 링크 - 을 나는 꽤 예전에, 하긴 영화도 10년이 지난 영화이지마는, 쓴 적이 있었다. 글의 주제는 이, 감정 과잉이고 다소 엉성한 짜임새의 영화가 주는 어떤 묵시록적인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이런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
1. 아역들은 연기를 못하며, 한국영화의 아역들은 특히 답이 없다.
2. 최민수의 연기는 구성에 대해 이질적이지만 그 자체로는 완성적이다. 즉, (다른 것들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연기를 잘하는 것 같으면서도, 붙여 놓고 보면 어색하다.
시간이 지나,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의 아역들이 연기를 참 잘한다더라. 그리고 최민수도 나온다더라.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게다가 내가 존경해마지않는 배우인 김혜자씨도 출연하지 않는가! 나는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와우를 하다, 반납기일이 다가온 책을 이틀 동안 후다닥 읽고 나선 문명을 했다. 결심이 다시 떠오른 건 건 사흘 전인가 동네 CGV를 지나치면서였다. 나는 상영시간표를 힐끗 보았고, 상영관이 의외로 적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이틀 전, 영화가 내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트위터에서 보았고, 나는 반드시 내 게으름 때문만이 아닌 이유로 영화를 보지 못하게 된 것에 화가 났다. 그리고 이런 부당함 때문에라도 영화를 반드시 봐야겠다는 결의를 했다. 이 결의는 바로 다음날, 이상하게도 신속하게 실현되었다.
나는 세종시로 갔다. 편도 열차요금이 영화표값과 같다. 이는 뭐랄까 미묘한데, 조금만 더 비싸거나 저렴했으면 나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통로에서 사이다를 팔지 않는 열차에 무슨 로망이 있단 말인가(여기서 나는 작금을 지배하는 꼰대정신에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조치원 메가박스에 정확히 도착하여(이는 기적적인 일이다), 매표소에서 CGV 쿠폰을 제시하는 덜떨어진 행각을 벌이면서(직원은 나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며,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광고중인 상영관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극장 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 몇 그룹이 있었다. 중간에 한 아이가 소리를 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다들 영화에 집중하는 것 같아 만족했다. 영화관 시설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적어도 내가 지금 있는 곳보다는 낫다(정말 여기는 제대로 된 게 없다).
아이들의 연기
위에 제시한 '한국영화의 아역들은 정말 노답'이란 명제는 이제 자리를 잃었으니 취소해야 마땅하다. 사실 "홀리데이"에서 10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좋은 연기를 하는 아역들을 여럿 목격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김새론이나 진지희 같은 배우들.
아역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 애들은 사고의 주체이지만,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 또한 감정은 있지만, 타인의 감정에 대한 적절한 이해 역시 결여되어 있다. 반대로 어른들 역시 아이들을 구상하는 데 마찬가지의 오류를 저지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망한 허위의 아동상을 전시할 뿐이다. 그 아동들은 과하게 순수하거나 과하게 영악하다.
따라서 작품의 아동은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지나치게 도덕적이거나, 지나치게 지혜로워진다. 이는 감정의 과잉(홀리데이)을, 도덕주의의 만연(이를테면 반공작품)을, 또는 아동이 작가의 대리인으로 이용되는 사태(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은 썩었단 말입니다!)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아동 캐릭터 자신은 인격을 상실한다. 게다가 그 괴상한 인간을 연기해야 하는 아역은 아직, 다른 사람에게로 갈 지적-감정적 능력마저 부족하지 않은가?
나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리라고 보지 않았다. 이는 재능 있는 아역과 더불어 제작자들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부분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령 '원자 아기씨'가 대신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거나, 애들이 나와서 재롱잔치를 벌인다거나 하는 것에, '아이고, 기특해라! 어른스러워라! 잔망스러워라!' 라는 따위의 찬사를 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TV를 보면서까지 육아에 열중하다니, 대체 '왜때문에' 대한민국의 출산률이 낮아지는 건지 원.
하지만 이 문제는 보시다시피 해결되어 가는 중이며(심지어 "아저씨"는 아주 막가는 영화였음에도), 여러분은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서 일종의 잠정적인, 그러니까 현재 시점에서의 완성을 볼 것이다. 아이 개개인의 연기도 괜찮지만, 그들 사이의 조합,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케미'도 훌륭하다.
물론 여전히 조금씩 부족한 부분이 있다. 가령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는 부분이라든가, 일렬로 서는 부분이라든가, '충고'하는 부분이라든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까지의 발전상을 놓고 봤을 때 사소하게 여겨지는 부분들이다. 또한 이런 부분은 작품의 어떤 동화적 성격의 개입 탓일 수도 있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는 적절하게 받아들여진다.
서술
나는 동명의 원작소설을 보지 않았다. 원작 소설은 대단히 사실주의적인, 게다가 영미식의 센스가 발휘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그것도 멋진 작품일 것이다.
원작소설에 비해 사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평을 하는 분들도 여럿 있다. 확실히 영화는 잔 선을 치지 않는다. 연출도 현실 인물의 행동에 비해 과장스러운(특히 휘장을 닫는 부분)인 구석이 없잖아 있다. 그리고 인물들은 현실에 비해 선량해 보인다. 이는 분명 부족하게 느껴질 만한 부분이다. 이는 윤제균 류의 조악한 낙관주의(이거, 국제시장을 보지도 않고 감독을 까고 있지 않은가? 다른 '천만 영화'인 해운대를 보고 말함임을 알아주시라)와 정확하게 구분되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 리얼리즘이란 현대의 사회를 표현하는 데(물론 우리가 지금 고대나 중세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가장 적합한 양식이다. 과장하자면 이것만이 실로 합당한 형식이다. 따라서 나는 아메리칸 히어로물을 좋아하지 않으며(개인적으로 다크나이트 역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음), 심지어 카프카나 이런 환상문학 작가도, 물론 그 가치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영 탐탁찮게 보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태도는 수용할만한 것이다. 영화 속 세상은 확실히 평화로워진 듯 보이지만,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결점은 개인의 천성적 선과 악이 아닌, 사람의 실수나 오만, 또는 욕심과 미망의 탓이다. 주인공은 집, 즉 고향에 다다르지만, 이는 그이가 근본적으로 선량해서가 아니라 선함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에 더불어 작품의 주인공은 반성적이다. 이와 같은 자세는 절대악과 절대선의 대립보다는 대체로 우월한 결과를 낳으며, 이 작품에서 역시 그렇다.
이는 사실주의에서 어느 정도 후퇴한 장르가, 특히 현실에서 쉽지 않을 해피엔딩을 바란다면, 당연히 취해야 할 윤리일 것이다. 게다가 아동문학에 특정한 비사실성을 바라는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유난히 그렇기도 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대체로 원작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결절들이다. 이 문제성을,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이 심각하게 체감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작품은 말했듯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작품도 아니다. 인물들이 겪는 문제의 현실적 근거는 작품에서 충실하게 서술된다. 또한 성인 배우 - 특히 강혜정 - 의 연기는 작품에 사실성을 더한다. 캐릭터는 어쨌거나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며, 또 그이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행위하고 있으니까.
폭력성
필요 이상으로 폭력적인 부분이 없다는 것도 영화가 갖는 현재적인 미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특히 그것이 때로 아이가 대상이 될 작품이라면 말이다. 흔히 말하듯 폭력의 과잉은 포르노그래피와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어른이 뭘 보든지 말든지는 간여할 바가 아니겠지만, 아동물에서 - 특히 시각화된 매체에서 - 아동이 그것을 봐도 괜찮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더 큰 문제는 폭력만으로 작품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가령 일본 만화인 '킹덤', '창천항로', 그리고 특히 '헌터X헌터'는 좋게 말해 유아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솔직히 말해 유치하게 짝이 없으며, 따라서 아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하기도 하다. 물론 주 고객층은 청소년들이지만, 실제로 아이들 - 흔히 말하는 '초딩'들도 많이 이 만화들을 본다. 그런데 이것들은 몇몇 '어른'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는데, 일부는 잔설정 - 가령 나가노 마모루를 보라 - 탓이고, 일부는 폭력성 탓이다. 1
분명 현실은 아이의 상상보다 더럽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하지만 그 폭력에는 심리적 근거와 사회적 형식이 갖춰져야 한다. 이것이 결여되면 괴이한 작품이 나오는데, 사람들은 이 폭력성 자체를 작품의 사실주의적 성격이라든가 심지어는 '작품성' 따위로 오해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제작이 "추격자(2008)"가 되겠다.
물론 있어야 할 폭력의 결여는 폭력의 은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반대는 "추격자"가 그랬듯 폭력의 정당화로 이어지기에 마찬가지로 불만스럽다. 여기서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적절한 선 - 마치 이 영화에서의 아이들의 역할처럼 - 을 지키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분명 현재 시점에서의 흥행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런 선택은 저 비사실주의에 관한 문제에 있어 적절한 변명으로도 여길 수 있겠다.
최민수 - 방랑자
나는 한국소설을 거의라고나 할까, 사실 전혀 읽지 않았는데, 작년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고 정영문의 소설을 몇 권 사 읽었다. 원래는 작년 말까지 평을 쓰려고 했는데, 올해로(아마도) 미뤄둔 상태다.
그러니까 히피의 문제다. 위에 언급한 작가의 한 소설에서 화자(아무래도 작가 자신)은 미국 서부에 가서 일정 시간 체류하는데, 그이는 그곳의 히피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어째서 관심을 보이는 것인가? 그것은 본론이 될 저 소설의 평에서 상세히 쓸 문제고, 여기서는 영화에 등장하는 '히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원작 소설에도 히피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분명 다음과 같은 인간이 존재한다 - 일정한 주거가 없고, 그날그날 벌어 먹고 사는 듯 보이며, 금전적 대가관계를 요구하지 않고, 호의와 감정의 맞부딪침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는, 심지어 잘 씻지도 않으며, 머리가 긴,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지배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떨어져 지내는 가족이 있는 어떤 남자 말이다. 그이는 전형적인 히피다. 물론 한국에는 누구를 히피라고 부르지 않는다. 미국의 히피들은 '사우스 파크'의 개막장들에게 쌍욕을 쳐먹을지언정(히피들이 그것에 관심이 있을지는 과연 의문이긴 한데) 어떤 공통의 정체성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단지 노숙자일 뿐이다.
어쩌면 '괴물'에 등장하는 노숙자가 이와 유사한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적 현실에 따라 이런, '자기 맡은 일을 하는 노숙자'는 아주 대단한 반전으로 여겨진다. 체제는 그들을 답이 없는 실패자라 낙인찍고, 강바닥이든 다리에든 서울역 굴다리에든 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사회주의자로서, 그들을 노동현장에 투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겠다.
뭐 어쨌거나 최민수야말로 저런 히피적 속성들을 가지고, 한국적인 상황에서, 영화라든지 뭣에 의해 특수하게 관념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일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최민수는 실제로 저런 행동들(링크)을 벌여 왔으니 말이다!
실제의 배우가 영화의 캐릭터로 틈입(침입)된다는 것은 홀리데이와 아주 유사한 현상이다. 그런데 홀리데이와는 다르게 - 아니, 세상에 그런 껄렁껄렁한 경찰이 어디에 있는가(설령 있더라도 그이는 정을 맞을 것이며 절대 관리직에는 앉지 못할 것이다)? -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최민수는 작품과 잘 어울린다. 심지어 아이들과도 말이다. 물론 이런 느낌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최민수의 고행기를 읽고 가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인다.
김혜자
김혜자씨(선생님이란 단어는 낯간지러워서 쓸 수가 없다. 뭐, 우리나라가 왕조국가였으면 그이는 틀림없이 작위를 받았으리라)에 대한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마치며
오늘 중앙일보에 실린 양우석과 윤제균의 대담을 보았다. 거의 홀리필드vs타이슨이나 프레디vs제이슨급의 매치라고 할 수 있겠는데(그런데 아주 유감스럽게도 저 두 분은 서로 다투질 않았다!), 이런 기막힌 자리를 알선한 중앙일보의 재주에 열렬한 찬사를 보낸다.
반면 오늘 우리의 주제가 된 작품을 제작한 회사의 대표는, JTBC에 나와, 영화시장에서의 공급, 그러니까 영화관의 상영관 배정이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토로했단다(물론 나는 어지간하면 종편을 시청하지 않는다. 고로 링크도 걸지 않음). 확실히 제작과 배급의 독점은 존재하며 또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나는 이에 엉뚱한 곳에서 CGV쿠폰을 꺼낸 나의 멍청함을 변명하려 한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분명 잘 만든 영화이다. 또한 비록 내 취향이 독특하긴 하지만, 나는 대중적 취향을 그리 모르지는 않는다고 자신하는데, 이 영화는 나이와 성별과 계급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는 내 주관이지만 아무래도 틀림이 없다. 관객들의 '입소문'이라든가, 인터넷에서의 평, 상영관 확대라든가 대관을 향한 노력, 그리고 소소하게는 내 뒤에 앉아 있던 애 딸린 아줌마들의 평, 그리고 대체로 얌전히 영화를 보던 아이들의 태도(아이들은 재미가 없으면 정말 기괴한 짓들을 하지 않는가), 뭐 그런 것들을 보면 말이다.
영화가 맞은 어떤 불합리함도 운수라고 여길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관객들에게도 불행이다. 따라서 나는 상영관이 늦게나마 늘어났으면 좋겠고, 그게 아니라면 어떤 독립적인 극장들에서 상영을 해 주거나, 유치원이나 학부모 모임 같은 단체에서 대관 같은 걸 해서라도,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기쁘겠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애국심', 흔히 말하는 '국뽕'에도 지대한 공헌을 할 것이다. 그것도 추억팔이가 아닌 현실의 자부심 말이다. 어째서 대통령은 (심지어 '넛잡'따위도 칭찬을 얻는데) 이 영화를 칭찬하지 않는 것인가? 영화를 보러 간다면 반드시, 한국인들은 이제 이렇게 영화를 잘 만드는 민족이 되었다, 는 것을 발견할 텐데 말이다.
- 이 작품들의 폭력은 "톰과 제리"나 "나홀로 집에"의 폭력성과는 또 다르다. 앞의 둘에서 나오는 폭력이 단순한 양적 과장 - 도둑들은 절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하지 않는다 - 인 반면, 언급한 만화들에서의 폭력은 실제 작품의 인물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긴다. 이 질적 차이에 대해서는 심슨 가족의 '이치 앤 스크래치(물론 이는 풍자이다)'를 참고하라. [본문으로]